본문 바로가기

창고

[유퀴즈 베스트] 니키리(이승희) 사진 아티스트

니키 리 유 퀴즈 출연계기

니키리
니키리 인스타그램

원래 방송출연을 안 하겠다고 했는데 남편인 유태오가 "유 퀴즈는 한번 생각을 해봐라"라고 권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주의 친구 5명이 찬성하면 나가기로 하고 전화를 했더니 모두 나가라고 했다. 또 한가지는 걱정하는 친구도 있었다.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깨질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환상을 깨기 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 유태오와 만남에서 결혼까지

니키리

태오 씨와의 만남은 영화 같았다. 밤에 뉴욕 길을 걷고 있었다. 너무 잘 생긴 사람이 떡 하니 서있더라. 너무 잘생겨서 쳐다봤다. 그랬더니 태오 씨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래서 서로 같이 쳐다봤고, 나는 '이게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남자가 나의 눈을 안 피하고 쳐다보니까 나도 뚫어지게 봤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태오의 이상형이 좀 작고 통통한 여자였다고 한다 자기 이상형이 걸어오니 쳐다본 거였다. 그렇게 스쳐갔고 동행인과 다른 곳에 갔다가, 다시 생각나서 돌아왔다. 그런데 거기 독일 음식점이 보였고, 그 안에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그 음식점에 들어갔더니 태오가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 정도 얼굴이면 대시가 많았을 것 같다고 했더니 없었다고 했다. 나만 용기를 내어 다가간 것이었다. 나는 일단 한국사람이냐고 물었고 한국인이라고 해서 너무 반가웠다. 내 동행인에게 더 말을 걸었는데, 그렇게 상대를 배려를 해주는 모습이 더 좋았다. 나는 그 독일 음식점에서 세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길에서 지나가면 집의 샹들리에가 보인다. 그런데 태오가 지나가며 그 샹들리에를 보고 저 집은 참 따뜻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세 번 만나고 결혼하겠구나 알았는데, 그냥 느낌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고, 내 말을 잘 들어줬다. 또 소년 미가 있었다. 아마 누구나의 만남도 다 영화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인 유태오의 긴 무명시절과 지켜주고 싶었던 소년미

니키리

태오는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여기저기 오디션을 봤다. 한국 와서 10년 있었는데 내가 벌어놓은 돈을 남편 뒷바라지하며 모두 썼다. 왜냐면 무명시절이 길었고(15년) 결혼하고도 10년의 무명이 있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 연출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그만두고 한국에 와서 시나리오만 계속 썼다. 처음에는 태오의 무명 시기를 3년 정도 생각했었다. 태오 얼굴이면 왜 못 뜨겠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뜨지 않았다. 그래서 한 5~6년 지나니 위기의식이 왔고 견딜 수 있는 기간에 대한 불안함이 들었다. 7~8년 지나니 '아 영원히 안 뜨는 것인가? 평생 고생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음을 좀 내려놨다. 태오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 했다. 워낙 성실했기 때문인데 내가 못하게 했다. 풍파에 치이면 얼굴이 상하므로 '너의 소년 미를 잃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내가 치마폭에 꽁꽁 쌀 것이라고 했다. 그게 너의 매력인데 그게 없으면 어디 가서 어필할 거냐고 했다. 파도는 내가 맞으면 된다. 

 

그런데 태오는 내적으로 나를 막아준다. 내가 멘털이 붕괴되고 무너질 때 잡아준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오후 네 시만 되면 힘들어서 울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항상 네 옆에 오후 4시만 되면 있어주겠다고 해서 진심이 느껴져 감동이었다. 매일 요리해줬다. 나는 외조를 열심히 했다.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매력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키 리의 꿈과 영화 연출로의 도전 

방송

현재는 태오가 주목을 받으니 감사하고 '되게 오래겄렸구나'라는 감회가 든다. 앞으로가 중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며 행복해하니 그걸 보는 게 행복하다. 나도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스타일이라서 뉴욕에서 많은 것을 이뤘고 커리어의 정점이었지만 다 두고 한국에 온 것이다. 10년 동안 시나리오만 5개 썼다. 그렇게 하려면 현실적으로는 힘들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포기와 용기가 필요했다. 다 실패하고 캐스팅까지 가도 엎어지고, 제10년의 시간이 남이 보기엔 실패이지만 나는 내적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난 놀은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시나리오도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프로젝트로 'Two Monks(두 스님)'이다. 외국 스님이 한국에 와서 겪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캐스팅 과정에 있고 캐스팅이 되어야 들어간다.

 

니키 리 대표작 'Project(프로젝트)' 작품을 하기까지

한국에서 사진 전공을 하고 뉴욕대 대학원 사진학과로 유학했다. 그렇게 '프로젝트'라는 작업을 시작했다. 학교 과제로 시작해 졸업했는데, 그게 화제를 받아서 뉴욕 미술계에 진출해 신데렐라가 됐다. 어떤 분야의 사람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 들어가 그들이 일부가 된 모습을 포착한 작업이다. 당시 정체성 화두가 큰 화제여서 본인만 찍은 사진은 많았다. 나는 환경과 주변 인물 안에 들어가 바라본다는 것이 새로운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다가왔다. 이런 분들과 사진 찍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두 달 정도 걸렸다. 그 집단의 정체성에 맞게 나는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정체성에 맞게 옷을 사고, 살도 빼거나 찌우거나 한다. 항상 처음에 내 소개를 한다. 이런 작업을 하는데, 괜찮다면 나랑 같이 어울려 친구가 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자기들이 봤을 때 자기들처럼 보이면 오케이를 한다. 이들과 생활하고 놀러 다니는 것이 한 달 정도 걸린다. 그래서 한 프로젝트를 찍는 것에 세 달에서 네 달 정도 걸렸다.

 

 

펑크 프로젝트와 스윙어 프로젝트

평크

스윙어 프로젝트는 스윙댄스를 추는 프로젝트였다. 1940~50년대의 미국 스윙댄스를 배우고 춤바람이 났었다. 이것을 위해 매일 네 시간 춤추고 끝나고도 춤추러 다녀서 재미있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펑크 프로젝트가 끝나고 스윙어 프로젝트를 했었는데, 스윙댄스 복장을 하고 거리를 걸어가면 뉴욕이란 도시가 작으니까 펑크 친구들을 만난다. 펑크 친구들이 놀라며 '어? 니키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으면 '나 지금 스윙댄스 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에서 서로 인사하고 얘기하다가 한국 노래방에 가자는 말이 나와서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에 다 같이 앉아서 나는 김수철 씨 노래 부르고 걔네들은 쳐다보고 하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시니어 프로젝트 

시니어

The Seniors Projct는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할머니 프로젝트다. 할머님들이 하루 종일 공원에 앉아계시니까 나도 앉아있었다. 처음에 "저는 학생이고 이런 작업을 합니다"라고 밝히고 할머니들도 그러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차대전 때 얘기부터 나온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이야기부터 하루종일 예전 이야기 듣고, 같이 뭐 좀 먹는다. 집에 갈 때가 되어 내가 '오늘 감사했다'라고 얘기하면 내 손을 잡으며 '얼마나 손자가 보고 싶냐'라고 이야기한다. 상황에 몰입되어 같은 할머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여피 프로젝트 

여피

여피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3개월 한 적도 있다. 당시 여피라는 것은 맨해튼에서 월가나 증권가에서 일하는 고소득자를 말했는데 그런 여피로 변신했다. 당시 트렌드가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것이었다. 예전 영화에 나오던 맥 라이언처럼 치마에 운동화를 신었다. 이상하게 여피 프로젝트만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그냥 해피아워에 맥주 마시고 직장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계속 일에 치여 일상의 에피소드가 없었고 그래서 고소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은 없고 돈은 많은 것이다. 

 

 

니키 리 아티스트의 성취 

사진 작품의 첫 전시가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첫 전시는 뉴욕타임즈에서 소개를 했고, 그 다음부터 전시를 할 때마다 뉴욕타임즈에서 기사를 실어줬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했는데, 그것은 이례적으로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가 됐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즈 손녀라는 말도 안 되는 루머도 있었다.

뉴욕타임즈

작품은 구겐하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어있다. 부자냐고 묻지만 부자는 아니다. 프로젝트 작업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2002년부터 2005년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 속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가지게 되는 정체성에 대해 탐구한 'Parts', 2008년에는 초상화를 겹쳐 겉으로 보이는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 'Layers'작품을 발표했다. 2004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아티스트이다. 

 

 

728x90
반응형